2021 03 21 The End
나는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키우지 않는 편이다.
취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취향을 타지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취향만 고집하면 사람은 자꾸 익숙한 것에만 눈을 고정하고, 편견을 갖게 되고, 이외의 것은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렇게 살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자꾸 끝에 관련된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끝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끝과 관련하여 생각하게 된다.
일본어를 한참 배울 때, 그런 표현을 좋아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지막이라는 단계속에서도 어떤 순서가 있다면, 그 마지막 순서를 지날때의 희열은 정말 남다를 것 같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쯤에는 이미 머릿속에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끝나고 난 다음 이후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아마 얼른 마무리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리라.
어떤 것을 하면서 써야할 에너지의 총량중 거의 대부분을 쓰고난 이후라,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처럼 화면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절전모드가 되는 것같은 상태, 얼른 배터리를 꽂아야할 것 같지만, 인간은 쉬면서 일을 마무리할 수 없다.
인생은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끝내었다가 다시 시작하고 그 사이에 좀 쉬고... 그러다 죽음이라는 진정한 끝, 영원의 시작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 영원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땐, 이 인생의 끝이라는 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 영원의 진입전에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끝내야하겠는가?
왜 이런 글을 쓰게 된건지 생각해본다. 나는 의식적이라기 보다, 늘 무의식적인 편이기 때문에 모든게 비동기적인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참으로 일관성있는 편인지라, 스스로 내가 왜 이러는지에 대해서 모르지 않는다.
나는 세상의 물질적이고 자본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게 너무 고단하고 힘에 겹다. 그런 세상에 적당히 맞춰서 살아가는 것도,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도 모든 것들이 쉽지않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하겠는가?
최근에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음에도 이제까지 힘들었다고 하며 떠났던 이의 음악을 들었다.
그의 마지막은 그의 인생이 화려한만큼 너무 뜬금없어서 꽤 오랫동안 인지부조화가 생겼던 것 같다.
왠지 아직도 어딘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당시 공장을 다니면서 힘들때마다 그의 노래를 종종 들었다. 좋아하던 노래는 '하루의 끝'
이후로도 시간이 꽤 오래 지났지만, 특별히 덕질하던 아이돌이 아니었는데도 자꾸 이글을 쓰는데 눈물이 난다.
끝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아마. 그런 마음인것 같다. 과학적으로는 인지부조화라는 객관적인 단어로 표현되겠지만.... 이건 내가 내마음대로 끝내고 싶지 않은데, 타의적, 또는 환경적인 이유로 끝나버렸을 때 생기는 일이다.
그 원형을 들여다보자면, 아이가 자신이 스스로 뭔가를 하고자 함에도 주변 부모나 타인이 마음대로 아이의 성취를 빼앗아버리는 것과 같다. 성취를 빼앗긴 아이는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구축하지 못하게 되버린다.
물론 발달적으로 아직 미숙한 아이에 비하자면 성인의 인지부조화는 사실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관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리 큰 일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온다.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도 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에 맞춰 고요해지진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한다는 마음은 인생의 발달과정에서 제대로 성장을 이루었을 때에야 가능하다.
다른 이야기이긴하지만, 하나의 다른 끝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불치병에 의한 죽음이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런 이유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심리적 단계를 거친다고들 한다.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갖게되는 분노, 이후 체념, 정리....
그 단계가 어찌 거기에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삶속에서 내마음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식의 단계는 찰나에도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는 오랜 시간동안 괴롭게 하기도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기도 한다.
끝이라는 단어와 죽음이라는 단어의 연관성은 전혀 연관이 없는데, 쓸데없이 연상하는 인간의 특성때문인건지. 아니면 정말로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내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평소에도 뭔가를 할 때, 자꾸만 끝을, 그리고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괜히 사라지고 싶다는, 또는 죽음을 아무렇지않게 생각하게 될 때,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스며들어 온다.
최근에 참 힘든 일이 많았다. 도대체 나란 애는 왜이렇게 마음처럼 안되는 일이 많은 것일까? 이런생각들.
내가 하는 생각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느 다른 누군가도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글퍼지다가 분노가 일어난다.
더불어 진정한 실험일지를 써보자면, 프로젝터가 제너레이터의 아우라를 흡수하여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고, 제너레이터에 대한 가이드가 해결되었을 때, 그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러니까 끝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그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최근에 말이다.
내 주변의 어떤 관계들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어떤 허무한 느낌.
그리고 나에게 던져졌던 어떤 사람의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
내가 필요할 때마다만 나를 찾는 이들의 초대에 기뻐하고, 그들의 일들이 해결되고 난 이후로는 잊혀지는 삶.
이게 정말 프로젝터의 삶일까?
최근에 알고 지냈던 제너레이터가 점점 변화하는 것을 보았다. 변화하는 것과 함께 더이상 나에게 컨택하는 수도 줄었고,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할만한 에너지도 얻었는지 뭔가를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럴수록 느껴지는 어떤 기이한 기분,
상대는 아마 알까?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나도 굳이 먼저 다시 연락해서 그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굳이 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은 이제 그럴 필요가 없기 떄문이다.
아직까지 내가 프로젝터로서의 자질이 성숙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의 변화는 기쁘지만, 이제 내가 할 일은 없다는 것, 그 사람에게 내가 이제 그저 평범해져버린것, 아니 이제 더이상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인지부조화를, 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아직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여러가지를 한번에 느끼고 있다.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감정을 토해내지않으려 노력하는 것 말고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차피 휴먼디자인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환상에 사로잡힌 헛소리같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말에 연락하겠다고 하던 친구의 부재도, 하나 있는 남동생의 연이은 전화거부까지 하나같이 체념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난다.
가끔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이미 사라진 기분이 들때가 너무 많다.
에고 프로젝티드 프로젝터에 4/6, 초대가 전부고 주변 인간관계가 전부인 유형중 가장 그런 유형
50대쯤되어서야 역할모델이 되서 지붕에서 내려오게 된다고 하는 그 유형.
이 휴먼디자인의 생리를 알고나서부터는 뭔가 답을 알게되었다는 시원함이 있으면서도 왜 하필... 이런 생각도 같이 하게되었다는 기분이 있다.
정말, 시한부의 삶을 사는 것같아 피가 말린다. 그거 말곤 답이 없어, 이런 느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실험은 계속 되고 있다. 알길 원하는 갈망, 타인과는 다른 시각, 역할까지 가보지 않고 내 삶의 무대가 막을 내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돌아갈 영원세계에서 나는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짓고 돌아온 분노도, 체념도 아닌 자아의 영혼이고 싶으니...